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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으로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추천해주신 단어장과 문법책을 사고 열심히 공부하기로 결심했는데 단어를 외우는 법을 몰랐기에 내가 선택했던 방법은 ‘쓰면서 외우기’였다. 좋지 않은 방법은 다 해보면서 생고생할 팔자다 나는. 이후에 얘기하겠지만 ‘쓰면서 외우기’는 단어암기법 중 제일 좋지 않은 방법이다. 


 

 단어를 하루에 40개씩 외우기로 했는데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간다. 처음엔 10번씩 쓰면서 외웠는데, 외워지지 않아서 쓰는 횟수를 20번, 30번까지 늘렸다. 그래도 안 외워진다. 이렇게 되면 진짜 돌아버린다. 팔은 아프지 단어는 머릿속에 안 들어오지 들어온 단어는 금방 까먹지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생겨서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 40개씩 외워 2달 만에 단어장 한 권을 끝냈다. 당연히 다른 과목 공부는 뒷전이었고 오로지 단어를 정복하겠다는 일념으로 단어장과의 사투를 벌인 끝에 얻은 결과였다. 일요일을 포함해서 열심히 외웠으니까 대략 2400개의 단어를 외운 셈인데 주변의 친구들은 이런 나를 보고 전부 ‘독한 놈’이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생겼다. 외운 단어를 다시 한 번 살펴봤는데 반도 기억을 못하는 것이었다. 아 내 머리가 이렇게 나빴던가! 열심히 노력했던 게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잠이 안 온다.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는 단어도 대충대충 외우는 것 같은데 시험을 보면 항상 나보다 성적이 좋고 문제를 푸는 속도도 빨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저 친구보다 더 노력하는 데 왜 성적이 나오지 않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인가? 억울했다. 친구가 얄밉기도 했고 내 머리가 나쁜 것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다. 잘하고 싶었으니까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미소를 짓게 만드는 어릴 때의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사실 노력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은 옛말이 되어버렸다. 내가 어렸을 적인 1980~90년도에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통해 근면을 강조하면 먹혔다. 그 때는 열심히 살면 잘되던 시기였으니까.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기회를 잘 포착해야 되고 같은 노력을 하더라도 효율적으로 해야 된다. 요즘 개미와 베짱이 얘기는 베짱이가 악기를 연주하면서 놀다가 연예기획사의 사장을 만나 가수로 데뷔해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얘기로 바뀌어 열심히만 사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이야기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성실함이라는 가치는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지만 효율성이라는 측면 또한 무시를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공부를 하면서 내가 선택한 방법이 효율적인지 항상 따져보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당시의 나는 개미였다. 요령을 모르는 무식한 개미. 그랬기에 베짱이였던 친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속으로 화만 삭히고 있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님을 다시 한 번 찾아갔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공부했던 방법을 들어보시더니 ‘복습은 했니?’라고 물어보셨다. ‘네? 복습이요? 안 했는데요.’ 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부족했던 것이 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복습이 중요했는데 내가 안 했었구나.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되지?’

 지난번처럼 또 삽질하기는 싫었기에 선생님께 단어를 공부하는 법에 관하여 귀찮을 정도로 질문해가며 단어를 암기하기 시작했다.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던 대로 복습을 꾸준히 실시했고 그 결과 2달 후 다시 한 번 단어장을 다 볼 수 있었는데 시간도 훨씬 단축되었고 아는 단어도 늘어났다. 별로 한 것은 없었지만 나름 보람을 느꼈기 때문에 계속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내 모의고사 성적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방법은 간단했다. 잊어버리면 다시 보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한 단어를 기억하기 위해서 사람은 평균 15-20번 정도 외운 단어를 잊어버린다고 한다.’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단어를 암기하려면 오랜 시간 기를 쓰고 보는 것 보다는 10분 내로 한두 번씩 훑어보면서 외우고 잊어버릴 때마다 다시 확인하면서 반복해서 외우는 것이 더 좋다는 말도 덧붙여 주셨다.

 비법을 확인한 나는 ‘쓰면서 외우기’를 당장 중단하고 이전에 사용하던 단어노트를 박박 찢어버렸다. 나름대로의 화풀이였는데, 솔직히 아깝긴 했지만 큰 미련을 두지 않고 공부를 시작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새롭게 가지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공부 방법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하루 단어 40개를 외우는 것은 동일했지만, 훑어보면서 예문을 소리 내어 읽고 뜻을 기억하고 다음 날 잊어버린 단어는 다시 한 번 체크하면서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봤던 단어를 반복해서 보다보니 모르는 단어의 개수가 점점 줄었고 단어를 외우는 것에 흥미를 붙이게 되었다. 

 아는 단어가 조금씩 보이니 이제 문제를 푸는 게 재밌어졌다. 문제집을 개인적으로 구입해서 읽어보고 푸는 것이 즐거워서 다른 공부는 별로 하지 않고 야자시간에 영어문제집만 풀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열심히 풀었는데도, 영어가 좋아서 문제를 푸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고 싶었다.

 이때쯤부터 학교 영어 수업에 싫증을 느끼게 된 것 같다. 솔직히 수업이 너무 지루했었다. 실력이 뛰어난 영어선생님께서 우리를 지도해주셨기에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사실 1분이면 내용 요약이 다 끝나고 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 짧은 지문 2개에서 사용된 문법과 구문을 설명하는 데 한 시간을 사용했으니 어린 학생들의 머리에 그게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었다. To부정사, 관계대명사 같은 어려운 문법사항을 설명하면 나는 항상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에 몰래 영어 문제집을 따로 풀었고 영어단어를 외우면서 수업시간을 보냈다. 외국어영역 모의고사에 문법문제는 한 문제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단어를 많이 외우고 문제를 많이 풀면 시험성적이 올라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또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께서 내가 수업시간에 다른 문제집을 공부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묵인해주셨던 것 같다. 그래도 공부를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나보다. 선생님께 죄송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끝난 게 아니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아마 선생님은 내가 어떤 문제에 직면하게 될지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열심히 오르던 외국어 성적은 어느 순간부터 제자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2400개의 단어를 외우고 약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어느 날 나는 지문 안에 있는 단어는 다 알고 있는데 문장이 이해가 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다. 뒤에 있는 해석을 봐도 내가 이해한 것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니 뭐가 이렇게 어려워. 짜증나네. 그냥 포기할까?’

 주변의 영어고수에게 문의를 해보니 ‘문법지식’이 없어서 그렇단다. 단어외우는 것에 재미를 붙여 문법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 탈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래. 이제는 문법만 보면 영어를 잘하겠지? 한계를 확인했으니까 문법이란 산을 넘으면 이제 영어는 완전 정복이야.’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품으면서 문법을 죽도록 팠다. 그 때 봤던 문법책은 ‘영어독해로 배우는 영어 필수 문법’ 이라는 내용을 핵심으로 밀었던 것 같다. 거의 12년 전이니까 아마 이 책은 지금 절판되었겠지만 그 당시에는 나름 잘 팔린다고 했었기 때문에 샀었고 그 책 역시 내 손을 거쳐 새까맣게 풀리고 분석되었다. 책의 이름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이 책이 그렇게 추천할 만한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난 다시 삽질을 한 셈이 되었다. 난 정말 운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말이다.

 책에 있는 예제를 다 푸니까 시험성적이 오르긴 올랐다. ‘책도 하나 끝냈겠다. 점수도 올랐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제 문법도 다 아는 것처럼 보였다. 친구들도 ‘야 너 진짜 영어천재다.’ 라는 말을 많이 해줬고 그래서 또 자만하게 되었다. 물론 이 때는 즐거웠고 영어를 잘하고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듣긴 했지만 이를 통해 잘못된 영어공부방법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는데 일조했던 셈이니 결국에는 운이 없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난 이 때 문법 문제집을 다 풀고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문장의 내용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 아니, 거의 단어의 뜻을 가지고 문장의 내용을 지레짐작하여 답을 찍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게 문제를 풀었는데도 불구하고 모의고사는 항상 70점대를 유지했으니 친구들이 잘한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 하지만 사실상 친구들은 나에게 속은 셈이었다. 문법적으로 문장을 분석하지도 못했고 알고 있는 내용을 쉽게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모의고사를 보면서 꾸준히 70점 이상은 나왔었고 수능도 꽤 괜찮게 봤었기 때문에 영어가 나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참 치기어린 생각이었다.

 처음에 했던 질문인 ‘영어 모의고사 성적이 좋으면 영어를 잘하는 건가요?’를 기억하는가? 대답은 당연히 ‘No’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모의고사 성적을 향상시켰고 주변에서도 다 영어를 잘한다고 칭찬해줬기 때문에 고등학교 3년 동안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대답은 'Yes'였고 내 마음속의 'Yes'는 꽤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었으니 다른 사람의 얘기는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 난 그렇게 거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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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비

책과 언어, 음악을 통해 평화를 얻고 싶어하는 이의 소소한 일상 (강연, 출판 및 원고 문의 : elcshaw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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